표지에 Life is not short라고 적혀 있다. 다들 삶이 짧다고 하는데 짧지 않다니. 그 한 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은 얇다. 내용도 짧게 끊어져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펼쳤다가 덮기 편했다. 출퇴근길에도, 잠깐 틈이 날 때도 한 꼭지씩 읽을 수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책은 세네카가 쓴 한 권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유튜버 하와이대저택이 세네카의 대화편 다섯 편에서 골라 55편의 짧은 글로 엮은 편역서라고 한다. 그래서 짧게 끊어지는 호흡이 나왔던 모양이다. 순서대로 읽어도 되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된다는 소개가 있던데, 실제로 그렇게 읽혔다.
2000년 전 사람의 말이 지금도 통하나
솔직히 나는 세네카라는 사람을 몰랐다. 찾아보니 로마 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이고,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참모였다가 결국 네로의 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시대와 지금은 너무 멀어서 처음엔 "지금 적용이 되겠나" 싶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대부분은 지금도 그대로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고대의 철학자와 정치가들을 예로 들어 주장을 받치는데, 이름은 낯설어도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몇 가지 적어 둔다.
남은 수명이 숫자로 적혀 있어도 지금처럼 함부로 쓸까. 이 질문이 제일 오래 남았다. 시간을 뭐에 써야 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디에 쓰면 안 되는지는 안다. 그러면 그것부터 줄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아닌 것을 지워 나가는 방식. 이건 책을 읽고 내가 만든 내 식의 결론이다.
나중에 하지, 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은 없다. 어제는 이미 없고 내일은 아직 없다. 진짜 있는 건 오늘뿐이다.
이것만 끝나면 하지, 하면서 매일 아침 의무가 끝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바쁨은 게으름의 반대가 아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의 몸부림이다.
큰 병에 걸리면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시간을 사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과 마주 앉는 것이다.
바쁨과 시도는 다르다
"바쁨은 방향을 잃은 사람의 몸부림"이라는 말을 두고 한참 생각했다. 나는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남들이 엉뚱하다고 하는 것도 다르게 생각해 보고, 나를 과소평가하지도 남을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것. 죽는 날 "아, 그거 안 해봐서 후회되네"가 없는 삶.

그런데 그것도 결국 이것저것 하는 거라 바쁨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생각해 보니 다르다.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바쁠 수는 있지만, 바쁘다고 해서 시도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기계처럼 바쁠 수 있다. 나중에는 자기가 왜 그걸 하는지도 잊은 채로. 갈림길은 양이 아니라 "왜"가 남아 있느냐였다.
내 삶을 요약하면 몇 분일까
요즘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다 보니 CCTV 요약, 드라마 몰아보기처럼 의미 있는 부분만 추려 주는 기술과 서비스가 계속 나온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을 의미 있는 장면만 남기고 요약하면 그 길이가 얼마나 될까 싶었다. 수명이 100살로 늘어난다 해도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요약본에 남을 장면이 과연 얼마나 될까.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는데,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크게 넘어졌던 순간이었다. 그 일이 "내가 왜 이걸 하는지"를 한 번에 선명하게 만들어 줬고, 그 뒤로 한동안은 아무리 바빠도 기계처럼 바쁘진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어떤가 하면, 솔직히 그 "왜"가 흐릿해진 부분이 있다. 일을 하면서 방향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 책이 말하는 쉼이 멈추는 게 아니라 자기와 마주 앉는 것이라면, 지금이 그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책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고전적인 마인드가 있고, 주장이 서로 부딪치는 데도 있다. 권력, 재력, 명성 같은 건 잠시 빌려 쓰는 거니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로 둔다. 읽으면서 좀 그랬다. 꼭 역사에 남아야 하나. 내려놓으라던 바깥의 기준이 결국 다른 이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살면 그걸로 되는 것 아닌가.
찾아보니 세네카 본인도 이런 비판을 2000년 가까이 받아 왔다고 한다. 부를 내려놓으라고 가르친 사람이 네로 곁에서 제국 최고 부자가 됐다는 점에서, 글과 삶이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그걸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시선도 있었다. 누구보다 바쁜 자리에 있던 사람이기에 바쁨의 허망함을 제대로 알았을 거라는 식이다. 어느 쪽이든, 이 사람의 말을 정답으로 받아 적기보다 하나하나 내 기준에 비춰 보며 읽는 게 맞겠다 싶었다.
한편 다른 독자들의 반응도 찾아봤는데, 한 꼭지를 읽고 다음으로 쉽게 못 넘어가는 책이었다는 서평이 있었다. 나도 그랬다. 가볍게 읽히는데 덮고 나면 생각이 길어진다.
다시 펼친다면
이 책은 서재에 꽂아 두고 한 번씩 꺼내 보려고 한다. 어디부터 볼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데나 펼칠 것 같다. 어차피 이 책은 정답을 외우는 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걸리는 문장 하나를 붙잡고 지금 내 시간이 어디로 가고 있나 돌아보게 하는 책이니까.
Life is not short. 짧은 건 삶이 아니라 내가 삶을 쓰는 방식이었다.
[목차]
| 초대 1부 곡식은 세고 시간은 세지 않는 사람들
12. 나는 아프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13. 건강한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14.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사람들 15. 짐이 짐꾼보다 무거우면 짐꾼이 깔린다 16. 손이 잘린 병사도 전우를 지킨다 17. 당신이 그것을 가진 것인가, 그것이 당신을 가진 것인가 18. 옆자리의 불만이 당신의 불만이 된다 19. 빌려온 것은 돌려줘야 한다 20. 분노할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하여 21. 거울 속 가장 위험한 아첨꾼 22. 폭풍이 아니라 멀미일 뿐이다 3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렵다 23. 혼자인 시간이 당신을 만든다 24.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의 위력 25. 당신의 9할은 당신이 아니다 26. 자연은 우리를 관객으로 만들었다 27.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언제인가 28.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가장 바빴던 사람이 아니다 29. 소크라테스는 왜 추방당했는가 30. 세 가지 삶은 결국 하나다 31. 낡은 배로 폭풍 속에 나가지 않는다 32. 멈추는 연습 33. 느림이 당신을 구원한다 4부 가장 많이 밟힌 길이 가장 위험하다 34. 가장 많이 밟힌 길이 가장 위험하다 35. 양 떼를 따라가는 당신에게 36. 군중은 진리의 가장 나쁜 해석자다 37. 행복은 이미 당신 안에 묻혀 있다 38. 왜 충분한데 모자란가 39. 쾌락은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 40. 부가 사라져도 당신은 괜찮은가 41. 당신의 불행은 정말 가난 때문인가, 비교 때문인가 42. 어제의 결심을 또 깬 당신에게 43. 소박함이라는 이름의 사치 44. 부러움이 사라지는 순간 5부 신은 편안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45. 왜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46. 한 번도 시험받지 않은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47. 신은 선한 사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48. 같은 비, 다른 사람 49. 신이 가장 즐겨 보는 광경 50. 항복할 줄 모르는 사람 51. 편안함이 당신을 죽인다 52. 운명이 빼앗을 수 없는 것 53. 운명과 싸우지 말고 춤춰라 54.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잔 55. 시간 앞에 단단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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