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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못 자는 밤에 집어 든 책, 《형태 없는 불안》

서맨사 하비 지음 ·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원제: The Shapeless Unease: A Year of Not Sleeping, 2020)


1. 포장지에 적힌 한 단어, "잠"

시골에 작은 동네서점이 생겼다. 지인이 연 가게라 인사차 들렀다가 구석에서 '블라인드 북' 코너를 발견했다. 책을 포장지로 꽁꽁 싸 두고 제목도, 저자도, 줄거리도 가리고, 겉에는 책 속에서 뽑은 문장 하나와 가격만 적어 놓은 코너였다. 책을 정보 없이 문장 하나로 만나는 방식이다.

내가 집은 포장지는 "잠. 잠."으로 시작했다. 돈처럼 극히 모자라야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부족해질수록 더 많이 생각하게 되며 끝내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 된다고 했다. 그 프리즘에서는 잠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문장 전체가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첫 단어 때문이었다. 요즘 나는 생각이 복잡했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니 "잠"이라는 글자 앞에서 손이 멈춘 건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문장은 책의 맨 끝부분에 있는 대목이었다. 서점 주인이 결말 근처의 문장을 골라 포장지에 옮겨 적은 셈이다.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읽고 나서 돌아보니, 처음 만난 문장이 가장 마지막 문장이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책의 구조와 닮아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책이었으니까.

2. 기대와 전혀 다른 시작

포장을 뜯고 나서야 표지 뒤에 적힌 소개를 읽었다. 저자는 부커상을 받은 유명 작가였다. 기대가 생겼다.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건네는 희망, 하다못해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결책 같은 것을 나는 어렴풋이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책은 사촌의 죽음에서 시작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슬픔부터였다.

책 밖에서 찾아본 이야기로는, 저자는 2016년 무렵,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갑자기 잠을 잃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사촌이 혼자 세상을 떠났고, 그가 발견된 건 이틀이 지난 뒤였다. 그 사실이 책 전체에 계속 울린다는 서평도 보았다. 하비 자신도 그 죽음과 불면 사이에 정말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다만 밤새 깨어 있으니 사촌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책을 영원히 덮고 싶었다. 잠 못 자는 사람이 위로받으려고 폈는데 죽음이 먼저 나오니 당황스러웠고, 어딘가 속은 기분도 들었다.

3. 그래도 끝까지 읽기로 했다

그런데 덮지 않았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포장지의 그 단어가 아직 나를 붙들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산 책이라는 오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읽을수록 주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흩어졌다. 이혼한 아빠와 강아지 이야기, 그레이트브리튼과 브렉시트, 엄마의 촛대, 수영하는 이야기, 정신병원 이야기, 그리고 현재형 언어만 가진 어느 부족의 이야기까지. 하나가 끝나면 다음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떤 대목은 이 얘기가 왜 여기서 나오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다 지쳐서 그냥 넘겼다.

책의 중간쯤에서 깨달았다. 이 책은 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불면증에 걸린 사람의 의식 세계를 그대로 늘어놓은 책이라는 것을.

이게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과도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면 하나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흘러가는 걸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은 한 사건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을 법한 사건으로 불쑥 건너뛰었다. 논리로 이어진 게 아니라 아무 고리에나 걸려서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내 머릿속도 정확히 그랬다. 이 책은 불면의 상태를 설명하지 않고 그냥 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나중에 서평에서 읽었는데, 형태 없는 문제를 정돈된 형태로 보여주는 건 오히려 안이한 일일 거라는 취지의 말이 있었다. 제목이 '형태 없는 불안'인데 글까지 단정하면 그건 거짓말이 된다. 형식이 곧 내용이었던 셈이다. 이걸 알고 나니 헤매던 시간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다만 이해한다고 해서 읽기가 쉬워진 건 아니다.

4. 내 안의 반박

고백하자면, 읽는 동안 내 안쪽 어딘가에서 계속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요즘의 나는 사실에 근거하고 논리에 맞는 서류를 쓰고, 그 논리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많이 한다. 문제는 쪼개서 정리하고, 근거를 세우고, 결론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 책은 설득하려 들지 않는 글이었다. 주장은 있는데 증명이 없고, 이야기는 이어지는데 인과가 없다. 그러니 머릿속에서 "그래서 결론이 뭔데?" 하는 목소리가 자꾸 튀어나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이 책이 말하는 불안의 모양 같기도 했다. 논리로 정리되지 않는 것, 하나씩 풀어서 끝낼 수 없는 것. 내가 평소에 쓰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 영역에 이 책이 있었다.

5.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다 읽고 나서 다른 독자와 비평가들의 반응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평가는 꽤 갈렸다.

칭찬하는 쪽은 주로 문장과 분위기를 높이 샀다. 뉴욕타임스 북리뷰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이 문장의 아름다움을 극찬했고, 가디언 서평은 최면에 걸리는 듯하면서도 때로 신랄하게 웃기다고 평했다. 그중 데일리메일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불안을 다룬 이 책이 결국에는 삶이라는 선물에 대한 즐겁고 장난스러운 찬가라는 것이다. 우울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의외의 표현이었다.

반대편의 비판도 있었다. 불면증을 읽는다고 해서 불면증이 낫지는 않고, 저자가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문체가 난해해서 끝까지 읽은 것 자체가 다행이라는 독자도 있었고, 중간중간 끼어드는 짧은 소설 조각이 없었다면 하나의 긴 에세이로 더 잘 읽혔을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브렉시트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대목이 유머를 의도했겠지만 오히려 지치게 했다는 서평도 있었다.

신기한 건 이 비판들이 내가 느낀 감정과 거의 같았다는 점이다. 불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읽다 보면 우울해지고, 끝까지 읽기 어렵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책의 평가가 갈리는 지점이 바로 그 형식이라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6. 두더지 잡기와 한 발짝의 거리

찬가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읽고 나서 내 안에 남은 생각이 있다.

불면은 부족해질수록 더 애타게 열망하게 되는 것인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불면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받아들이면 별것 아니게 된다. 내가 엄청나게 대단하게 여기던 최근의 관심사도 마찬가지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주에 다녀온 사람들이 아주 작은 지구를 보고 돌아오면 이전과 다른 깊이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비유가 맞는다면, 이 책을 읽는 일은 불면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 같은 것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세상 전체가 되던 것이, 멀리서 보면 작은 점이 된다.

사실 최근의 나는 어떤 일에 깊이 몰두했고, 그 일이 형태 없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이런저런 생각이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고,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가 올라왔고, 그것이 결국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이 책이 지겹도록 나열해 놓은 뒤죽박죽 생각의 고리와 내 머릿속의 두더지는 같은 모양이었다. 그걸 글로 읽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두더지들이 조금 잠잠해졌다.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다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짝 물러나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감정에는 홀가분함과 허무함이 둘 다 있다. 처음에는 이 둘이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따져 보니 같은 느낌을 긍정으로 보느냐 부정으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인 것 같다. 같은 책을 두고 어떤 사람은 우울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즐거운 찬가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느낌은 하나인데 이름을 붙이는 쪽이 갈린다.

7. 서맨사 하비라는 작가

이 책이 내가 읽은 첫 하비의 책이다. 읽고 나니 이 작가가 궁금해졌다.

1975년 영국 켄트에서 태어났고, 철학을 공부한 뒤 창작을 전공해 지금은 바스 스파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한다. 책 곳곳에서 존재와 기억, 시간 같은 철학적 주제가 튀어나오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2009년에 알츠하이머를 앓는 건축가를 그린 데뷔작 《The Wilderness》로 베티 트래스크상을 받았고, 2024년에는 우주정거장의 비행사 여섯 명이 하루 동안 지구를 열여섯 번 도는 이야기를 그린 《궤도》(원제 Orbital)로 부커상을 받았다. 136페이지로, 부커상 수상작 중 두 번째로 짧은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이 하비의 작품 중 가장 형식이 풀어헤쳐진 책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소설들은 대부분 분명한 틀을 가지고 있다. 《Dear Thief》는 멀어진 친구에게 쓰는 긴 편지고, 《The Western Wind》는 중세 마을에서 일어난 죽음의 진실을 시간을 거슬러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책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서 다른 책도 그럴 거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두 권이 끌린다. 하나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궤도》다. 내가 이 책에서 얻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시선"이 소설로 쓰인 느낌일 것 같다. 다른 하나는 기억이 무너져 가는 사람의 시점을 따라가는 《The Wilderness》다. 기억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불면의 밤이 아니라 소설의 틀 안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하다.

8. 마치며

솔직히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뜻 권하기는 어렵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줄 책도 아니고, 읽기 편한 책도 아니다. 나도 첫 장에서 덮고 싶었고, 끝까지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은 밤들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아니었다. 잠이라는 단어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책이, 내 머릿속의 형태 없는 불안을 거울처럼 비춰 주었다. 그걸 보고 나니 조금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점 주인이 그 문장을 포장지에 적어 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모자랄수록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게 어떻게 힘들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것. 그 문장이 이 책의 끝이자, 어쩌면 처음 읽는 사람에게 건네는 첫인사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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